[베트남go] 사이공의 관광중심거리 "동커이"
[베트남go] 사이공의 관광중심거리 "동커이"
사이공의 중심가 인천공항에서 호치민으로 이동하는 비행시간은 약 5시간30분 소요된다. 호치민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해서 그곳에 마중나온 전우들와 만나면서 여행은 시작이 되었다. 월남참전용사에게는 사이공으로 인식되어있는 자유월남의 수도 사이공은 1975년 4월30일 자유월남 수도 사이공이 함락 당하면서 패망하고 북베트남 월맹군에 의해 사회주의로 통일되면서 사이공 명칭이 호치민으로 변경되었다. 맹호10포병 A포대 전우들이 월남전 전적지 답사여행을 떠나 오후시간에 베트남 땅 사이공에 도착하여 시내중심가 동커이(Duong Dong Khoi) 거리에 나와 호치민시 관광중심거리를 돌아본다. 월남전때부터 유명했던 렉스호텔 길건너편엔 인민위원회 청사(옛 프랑스 총독부) 건물이 있다. 호치민의 상징 건물인 인민위원회 청사는 프랑스 통치시절에 지어진 전형적인 프랑스식 건물로 밤이 되면 바로 옆에 위치한 렉스호텔과 더불어 우아한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한다. 월남전 당시엔 잘 지어진 옛날 프랑스 총독부 건물앞에 예술작품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지고 호치민 동상이 그 자리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공은 메콩강을 접하고 있어 아름답고 운치 있는 경관을 자랑한다. 강변을 끼고 특급 호텔이 줄지어 있고, 그 끝쪽으로 인민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좋은 위치에 호텔과 프랑스풍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걸 참전용사들이 보면서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기억에 잠긴다. 호치민 동상을 등뒤에 두고 찍은 사진인데 오른쪽 빨간깃발 달린 백화점 건물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지난번 시리즈에 겨울스포츠잠바 노스페이스 싸게 파는곳을 알려준다고 했는데 바로 그곳이다. 이 백화점의 2층 맨끝쪽에 옷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베트남에서 생산하는 유명브랜드 스포츠 잠바를 파는곳이다. 외국브랜드 임가공을 하다가 로스품이 나오는데, 수출품 겨울잠바는 베트남은 열대지방이라 입지 않으니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지난번에도 아는 사람은 자기꺼 아들꺼 마누라꺼 세벌씩 사간 전우도 있다.ㅋㅋ 노스페이스 겨울잠바 가격은 68$~76$ 인데 76$짜리는 내피를 빼어서 따로 입을 수 있는거라 그렇다. 모델은 다양하지 않아서 전우들이 한벌씩 두벌씩 샀으니 겨울에 산에가면 옷모양이 똑 같을것이다.ㅋㅋ 옷 파는 저 가게와는 전혀 광고계약이 없었고 커피한잔 얻어먹은거 없슴을 밝히는 바입니다. 최진사도 아들꺼까지 2벌 샀는데 이번 한라산 갈때 입어봤더니 고어택스 제질이라 참 좋았다. 괜찮아 보여요? 다른사람이 그러는데 이런거 한국에서 살려면 50만원도 훨씬 넘는데요.^^* 세벌 구입해간 전우는 여행경비 모두 건졌네...ㅎㅎ 이렇게 선전해 놓으면 그 옷가게 북적거려서 옷값 올려 놓는건 아닌지 모르겠네... 바로 길건편엔 랙스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월남전때 미군들이 사용하여 유명했던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분수대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월남전 당시에도 고급차가 많았네. 그 자리에서 확인해보니 이 사진은 렉스호텔 3층에서 분수대를 내려다보며 찍은듯 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조명을 벽면에 쏘아올려 호텔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연출한다. 바로 옆에 위치한 프랑스풍의 인민위원회 청사와 더불어 우아한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한다 그보다 더 이국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오토바이 물결이다. 크락숑 소리와 마후리의 합창...정신을 쏙 빼놓는다. 이방인들의 사이공 첫인상은 이 거리에서 더욱 뇌리에 박힌다. 대부분의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일정은 우리 코스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사이공 주변의 명소 몇곳을 더 소개하고 끝내려고 한다. 한곳한곳 자세히 소개하면 좀 더 늘릴 수도 있다. 늘려도 괜찮나요? |
마리아 동상이 있는 노틀담 성당 우측에는 프랑스 통치시대인 1886~1891년에 프랑스 건축스타일로 지어진
중앙우체국이 있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어가서 이용할 수 있는 우편 및 전화국 시설이다
노틀담을 구경하고 길 건너면 우체국이 있으니까 많은 여행객들의 관광코스가 되어 이방인들이 눈에 많이띈다. 19세기 말 프랑스 통치 시대에 지은 건축물로 동코이 거리 북쪽 끝에 있으며 인접한 성모마리아 성당과 함께 지난날을 기념하는 명작으로 꼽힌다.
내부는 왠만한 체육관 보다도 넓으며 아치형의 높은 천장과 정면에 호치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호치민 시내의 가장 큰 우체국이면서 베트남 국내와 국제 우편물의 접수, 국제 택배 창구와 국제 전화용 부스 등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가운데에는 기념우표를 구입할 수 있으며 방문기념 스탬프를 찍어가는 곳도 있다.
입구 왼쪽벽면 아치형 공간에는 베트남 남부지역의 지도를 그려 놓아서 메콩강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입구 중앙에는 고풍스런 긴의자가 있어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고개를 들면 사이공 지도가 보인다. 자그만 전화부스엔 장거리 전화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우체국도 관광명소라니 대단한 착상이다.
입구 오른쪽 아치벽면엔 사이공 시내 지도가 그려져 있다. 빛이 바랬지만 사이공 강들의 모습은 뚜렸하다.
기념사진 찍읍시다!
최진사 한마디에 좌우로 정렬...손발이 척척 맞는다. ㅎㅎ
안내하는 미즈 쫍이 거리감없이 농담도 하고
밀착 안내를 하여 전우들을 즐겁게 했다.
"고마워요 미즈 쫍..."
이남원 전우와 같이 간 팀(?)과 서로 이산가족이 된 우리는
만나기로 한 렉스호렐앞 인민위원회 호지명 동상 앞으로
가야하는데 가까우니까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성당과 우체국 앞쪽길에는 뭔가 또 다른 붉은 벽돌 건물과
초현대식 건축물이 보인다.
그런데 최진사가 동서남북이 헷갈려서
옆건물 오른쪽으로 가면 렉스호텔이 나올 것 같은데
미즈 쫍이 왼쪽길로 가야만 된다고 했다.
혹시나 낙오병이 생길까봐 신경을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베트남go] 호치민 전쟁기념관 #2
War Remnants Museum - 전쟁기념관 #2 베트남 전쟁기념관 실외전시장에는 월남전에 사용되었던 각종 전쟁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긴 포신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176mm 장거리 대포가 상태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한국군이 실전에 많이 사용했던 155mm 대포와 105mm 대포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크기가 좀 작고 탄피가 있는 105mm 포탄과, 탄두만 있는 155mm 포탄이다. 타식 조명탄을 발견한 맹호용사들 할 이야기가 많다. 매복나간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뚜껑 빼서 뒷꽁무늬에 끼워 탁! 치면 발사되는 조명탄을 많이 써 봤을것이다. 깡통모양 지뢰와 크레모아...월남전 당시에 우리나라 최전방 GP에도 크레모아가 있었다. 발목지뢰...밟으면 불구 아니면 사망이다. 대전차 지뢰...길바닥에 묻혀있는지 도로정찰팀들이 지뢰탐지기로 많이 찾고있던 물건이다. 박격포 이것도 탄피가 없고, 장약(화약)이 포탄 날개옆에 붙어있고 포신이 탄피역활을 해서 발사된다. 전쟁기념관 바로옆에 프랑스 통치시대때 지어진 감옥을 구경하도록 통로가 있어, 감옥으로 들어가고있다. 프랑스 통치시절 쓰던 단두대...아래 구멍에 죄수목을 끼우고 덜커덩! 위에서 작두 칼날이 떨어지면... 창살이 위에 있다. 그 아래 골방에 죄수들 발목이 족쇄로 체워여있다. 하여튼 이곳엔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이곳은 마음을 편치않게 하는곳이다. 만약 일정에 쫓겨 시간이 모자란다면 이곳은 코스에서 빼 버려도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용산 전쟁기념관보다 훨씬 수준차이가 나니까 말이다. |
"푸미홍(Phu My Hung)" - 호치민의 강남區 맹호10포병 A포대 전우들과 전적지 답사여행 기간중 사이공(호치민)에 머문곳은 "푸미홍"에 있는 호텔이었다. 최진사가 2파때에는 동코이 거리에 있는 킴도호텔, 세븐스타호텔에도 머물러 봤으나, 복잡한 시내는 번잡하고 소음이 심하고 밤에 돌아다니기도 뭔가 불안한 구석이 있었으나, 신도시 "푸미홍"지역을 알고부터 3파때부터는 계속 그곳에 숙소를 잡았다. 우선 공기좋고 깨끗하고 치안이 확실하여 저녁 밤공기 쐬러 나가도 한국처럼 전혀 부담이 없는곳이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음식점 및 편의점, PC방, 발맛사지 등 시설이 근처에 있어 걸어서 찾아 다니곤 했다. 저녁먹고 심심하면 슬슬 걸어다니면서 길가의 까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시원한 맥주도 한잔 걸치면 어여쁜 꽁까이들과 손짓발짓 잊었던 월남말도 한번해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다. 푸미홍 지역은 거의 늪 지대에 가까운 불모지였던 호찌민시의 남부 지역을 대만계 회사가 개발한 신도시이다. 최초 베트남 당국은 이 거대한 신도시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했는데, 도시를 꾸며나가는 과정에서 기존 베트남의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가 만들어지자 이곳의 집과 땅값은 엄청나게 뛰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물론 베트남 부유층까지 이곳 푸미홍 진입을 노리고 있단다. 푸미홍 회사는 당연히 거대한 이익을 남기게 됐고 베트남 당국은 이에 대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 세금 폭탄을 맞고 비틀거리던 푸미흥 회장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푸미흥은 이렇게 불행한 사연이 있는 도시다. 푸미홍은 아직 미완의 도시이지만 건설장비 크레인들이 여기저기 올라가고, 먼저 도로를 확충하고 있는 것이 보이고, 국제컨벤션센터 건립, 초대현 할인마트 롯데마트 개장, 등 속속들이 도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부근엔 사이공강이 흘러가고 다리가 놓이고, 9홀 골프장, 골프 연습장, 수영장, 테니스장이 생겼고 대형 프랑스 종합병원이 근처에 있고, 한국·대만·일본의 학교가 들어섰고 각국의 국제학교가 거주민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푸미홍은 향후 아시아에서 가장 쾌적하고 살기 좋은 거주지로 부상할 전망이다. 이곳엔 한국인들이 많이 입주해 살고 있다고 전한다. 수퍼와 미용실, 한국식당, PC방, 당구장, 각종 학원들이 이곳 상가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베트남의 코리아타운이 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베트남 경비회사가 24시간 경비를 맡고 있어 사이공 지역에서 치안 측면에서도 베트남 최고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는 공항 근처 "팜반하이" 였고, 현재도 식당이나 노래방, 당구장, 수퍼, 떡집, 빵집, 책방 등 여러 곳이 남아있으나 상사주재원이나 한국회사 직원들이 점점 푸미홍 지역으로 이동 중이다. 푸미홍 지역은 처음 베트남 상류층을 겨냥한 계획된 도시였는데 교육, 교통, 여가, 의료 등 여러모로 베트남 타군과는 다른 신흥도시로 발전해 많은 한국 교민과 외국인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최진사가 보기에도 살기에 쾌적한 환경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한인촌으로 자리 잡는 것 같다. 그러나 최진사는 누가 이곳에 같이 살자고해도 물가가 비싸서 노땡큐이다. 이곳에는 큰호텔은 없지만 그냥 며칠씩 머물다 가는 것은 부담이 없다. 5파때에는 스쿠터 탄 아가씨들이 술 같이 마시자며 히야까시(?) 하는통에 당황한 적도 있었다. 맥주한잔 사주며 베트남말 몇마디 써먹어 볼걸..."안~유~엠~" ㅋㅋㅋ 시원한 열대의 푸미홍 밤거리...4파때보다 5파때는 길가에 테이불 놓고 맥주 파는 까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
월남 패망의 역사적인 사이공 함락 대통령궁 침공
사이공의 함락 - The Fall of Saigon
1973년 미국의 헨리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월남전을 끝낸다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키신저는 협정대가로 월맹에 40억 달러를 줬다.
그것은 자유월남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았다.
자유월남에게는 유사시 즉각 군대를 보내 지원한다는 방위조약을 맺었다.
키신저는 이 업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월맹이 남침준비를 하는동안 월남은 평화협정의 환상에 젖어 있었다.
월남을 환상에 빠트려 내부에서 무너트린 것은 정부 대학 재야단체에
광범하게 침투한 간첩과 동조자들이었다. 그수는 5만명에 달했다.
반전여론에 밀린 닉슨은 탄핵 당했고, 그로부터 2년후인 1975년 3월
월맹군은 휴전협정을 깨고 다시 남침했다. 미국은 월남국민이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할 문제라며 개입하지 않았고 군수품 지원도 하지 않았다.
파리 휴전협정은 종이조각에 불과했고, 약속은 물거품이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는 월남군은 사기가 떨어져 중부도시 "다낭"이
침략당하자 혼란에 빠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갔다.
다낭이 월맹군에게 침략당했는데도 좌익 주도의 월남 언론은
다낭에서 시민군이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고 보도하였다.
티우 대통령이 국민에게 전쟁발발 담화문을 발표했는데도
좌익 시민단체들은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오히려 티유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압박을 가하였다.
월남군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달아나기에 바빴다.
1975년 4월29일 월맹군 탱크들이 사이공 시가지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적군의 침략임을 깨닫고,
그때서야 미국이 월남 방어를 포기하지 말아줄 것을 바랐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완전히 자유월남에서 빠져나간 후였다.
1975년 4월30일 자유월남은 패망했고 대혼란이 일어났다.
천주교 운동세력 사제단 신자들을 비롯한 불교신자 그리고
월남의 통일운동가 좌파들도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이 빨갱이들의 주장이었다.
그 외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까지 합하면
적화된후 살해당한 사람들의 수가 무려 9백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목숨 걸고 탈출한 보트 피플의 수가 106만명이었다.
월맹보다 20배의 경제력과 10배의 군사력을 갖춘 자유월남이
어이없게 허물어질 줄 월남 국민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한 전략을 잘 알고 있는 북한 공산당 집단은
지금 미국과 직접 협상을 시도할려고 행동하고있고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좌파들을 선동하고 있는데,
종교단체들은 촛불시위를 선동하며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휴전선을 두고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실정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권은 당파싸움에만 휘말려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의 경험적 충고를 듣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심대흥: 월남전에 참전했던 우리 파월용사들에겐 이름모를 풀한포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흙한덩어리 모두가 추억이고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서 까마득히 기억에서 살아졌지만 애써 <저곳이 그곳이라고> 우기고 손벽쳐 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언젠가 배타고 축제행사를 다녀온 유람기를 소개했다 해서 탱야탱야한다고 쓴소리를 헀다는 그 사람도 생각해 보면 추억을 간직하지 못한 불쌍한 중생입니다. 전쟁속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총탄이 날라가는 속에서도 꽃은 피고 사랑은 익어 갑니다.오늘날의 베트남을 보면서 우리는 40여년전의 그때를 그려보는 회상속에 빠집니다. 그득 들어서 있는 마을을 볼떄 아~ 그때는 선인장 몇그루 서있던 황량한 모래사장이였는데... 생각하고 또 그곳에서 모래푸대를 담아 날라 뱅커를 구축하던 전쟁 그때를 생각해 냅니다. 시장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열대과일을 보면서 맘씨좋은 주민이 하나 따주던 시원한 야자를 그립니다. 그리고는 대검으로 몇번을 찔러도 옴짝도 않던 그 야자를 단한번에 부엌칼로 뭉텅 갈라주던 그네들의 귀신같던 솜씨를 머릿속에서 끄집어 냅니다. -[01/21-11:03]-
차경선백마-공수: 저 백화점 얘기에 눈이 확 뜨입니다. 진사님 한라산가서 입고계신 그옷, 한국의매장에서 파는것 대부분이 Made in Vietnam 인데 말씀마따나 가격이 만만치 않거들랑요. NAN 지금 입고있는거 개비할때가 훨씬 넘었는데.......60~ 70불이라면 최소한 4벌은 사야겠십니더.....
나좀 데블고 가주셈~~~ㅎㅎㅎ -[01/21-11:15]-
안흥종: 겨울 잠바 35만원주고 샀는데 진사님 입은 것보다 못한것 같습니다. 낮익은 거리가 보이네요 엿가락처럼 늘이기 바랍니다. 탐방기 끝나면 식사 같이 하겠습니다. -[01/21-11:24]-
심대흥: 투이호아 사진을 보고 나는 앨범속에 꽁꽁 숨겨 두었던 옛날 사진들을 끄집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를 회상하며 한줄두줄 추억담을 늘어 놓아 보았습니다. 좀더 재미있으라고 엉터리 주장을 해서 갑론을박을 벌려놓고 서로의 공동추억을 다시 끄집어 내기도 했습니다. 멀쩡한 유격훈련사진을 놓고 그때는 통일화가 없었느니 건빵바지가 있었느니 웃음속에 논쟁을 벌리며 희열을 느꼈습니다. 만약 이런 여행기가 없어더라면 우리는 그냥 밋밋한 생활속에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자신의 심신을 한탄하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겠지요.
어찌어찌하노라 저는 한번도 베트남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였던 그곳을 다녀오는 전우들을 보면서 부러움 반 시새움 반으로 매일매일 키보드를 두들깁니다. 어디던 내가 있었던 월남 그곳을 보고 싶습니다. 투이호아도 나트랑도 사이공도.그리고 이름도 듣지 못했던 그곳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냥 아무곳도 좋습니다. 우리가 갔던 월남 ㅡ그곳이면 그걸로 족합니다. 구석구석 보여주십시요. 더 늘리고 줄이고 할 이유가 어디 있나요? 전우님들이 가 보셨던 곳곳 모두를 여기다 올려 주십시요.선상에서 베? -[01/21-11:26]-
심대흥: 트남 꽁까이가 부르는 아라랑을 들으며 럼주 한잔을 마시는 전우들을 보면서 나도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도우렵니다. 다만 수고하시는 그 마음만은 잊지않고 보겠습니다. -[01/21-11:29]-
황진순: 집사람도 맹그로브 숲과 수산시장 그림을 티비에서 보니 조금 가볼 마음이 생기는것 같군요..이참에 살살 꼬셔 안케에 갔다가 바로 사이공으로 가자고 연막을 ? 칠랍니다. 다음 여행기 기대 합니다..보훈 병원에 다녀오니 몸은 더욱 좋질 않다고하고 날씨도 우중충하고 영 기분이 별로이나 진사님 그림보고 즐겁게 오늘하루 지내렵니다. -[01/21-11:36]-
박남철69: 전적지 여행을 다녀온지 한달조금지났는데 지금기억속에 뚜렸이생각나는겄은 옛날생사를 넘나들던 추억이 묻어있는 부대자리와 부대옆마을의 귀여웠던꼬마소녀 (웡티한)를 어럽게찾아서 만난겄 그리고 우리월참전우님들이 머물렀던 전적지 몆군데와 아름다운 해변등... 빠른 스케줄이라 마음놓고 쉬면서경치을 즐길여유는 없었습니다. 가끔 진사님이 올리신 그림들을 보면서 아~저기도 갔었지하고 생각나고 묻혀있던 기억들이 새록 새록뜨오름니다. 저그림들을보며 그순간들를 음미하며 다시한번더 가고싶어진니다. 제마음도 이런데 대부분 전우님들마음도 같으시리라생각합니다. 계속..수고하시는 진사님께 감사한마음 전합니다. -[01/21-13:31]-
박용환: 노스페이스라는 메이커 웃도리 한개사러 갈수도없구하니....걍~~!!아무거라도 좋우니깐...쭈욱..!!올려주....3==아주 쭈욱!!!ㅋㅋ -[01/21-14:35]-
류병욱: 참으로 음악도 잘 어울리고 사진도 잘찍으셨네요 둘다 감상잘했습니다 -[01/21-15:49]-
김영배: 그간의 세월이 많이 흘러 변한것과 곳이 많겠지만,난,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의 장소를 가 본적이 없어 사실,속으로"도심지는 보통 저렇겠지."그런 생각만 든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에 저-장소에 가봤거나 기억을 하는 전우님들은 사진을 보며 많은 회한에 젖으실 것으로 생각되어 부럽기 짝이 없고,"나는 왜?저런곳을 모를까, 속상한 마음이다.사람들 마음은 다-다른지,난-,사진속에 최남열 전우님의 뒷 모습과 최진현 전우님의 얼굴이 보여 반갑다.(다른 전우님들 성함을 몰라 죄송합니다.) -[01/21-16:40]-
김재한: 베트남여행을 몇년동안 최진사와 동행하다보니 싸이트 사진을 보면은 항상 고마움을 느낌니다, 사진게제가 거의 끝나는 것같군요, 날씨가 차가우니 베트남 생각이나서 어제도 최남열전우와 이남원전우에게 전화를 했지요.베트남파월 전우님들의 새해에는 만사형통 하시고 건강과 행운이 가득 하시기를 기원 함니다. -[01/21-18:31]-
최성영: 현재의 시각으로 보는 Saigon(호치민으로 바뀌였습)은 아담하고 작게 보일테지만 1965년의 사이공은 알려진데로 동양의파리 라는 이름값을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아메리칸씨저)엔 한국의 수도는 서울인데 14세기 유럽의 도시를 떠오르게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65년당시엔 자기 아버지나라 케냐와 한국의 경제상황이 엇비슷 했다고 지적한데로 싸이공은 서울보다는 더 서구적 이엿습니다. 현재 서울의 모습은 천지개벽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01/21-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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